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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시를 그리는 양순열 화백의 그림 - 김주영(소설가)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른다. 그리는 것은 물론 감상할 줄도 모른다. 딱히 친숙하게 지내는 화백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이론적인 평가 또한 내가 가진 자질과 소양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어떻게 이 글을 쓰겠다는 것에 선뜻 동의 해버렸는지 내 스스로에게 당혹스럽다. 굳이 까닭을 찾자면 나의 겸손하지 모함과 신중하지 못함과 철없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대로 고백한다면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나는 한동안 주저하였다. 당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나는 양 순열 화백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양순열 화백으로 말하면, 이미 화단에선 중진을 넘어 원로의 대접을 받는 분 일진데, 이론적으로나 그 명성에 있어서나 고매한 경지에 이른 화단의 원로들에게 글을 청탁할 법도 한데, 어째서 전혀 무뢰한인 나를 찾아 낼 생각을 가졌을까. 나름대로 그 연유를 찾아내겠다고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끌게 되었다. 그의 화집을 뒤지고 또 뒤지며 시간을 끌었는데도 속 시원한 해답은 곧장 얻어 낼 수 없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한 것이라면, 나는 매우 가슴 쓰라린 추억을 가지고 있다. 나는 양순열 화백의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산골 마을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가난했기 때문에 학용품은 물론 교과서도 없이 초등학교 6년을 보냈다. 그 학교의 학습과정 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미술시간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그 시간이 닥치게 되면, 나는 잡기장을 찢어서 교실 바닥에서 주운 몽당연필로 그림을 그렸다. 시골 아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항상 같은 풍경이었다. 교실 창밖을 바라보면 바로 코앞에 앞산이 바라보이고 그 산 아래로 내가 흐르고 있었다. 연필로 대충 산과 내를 그린 다음 나는 그림에 덧칠 할 크레용을 빌리려 온 교실을 쏘다녔다. 그러나 반 아이들 대다수도 나처럼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앞산과 내를 그리고 있었다. 그래서 파란색과 푸른색 크레용들은 일찌감치 동이 나버렸기 때문에 언제나 새것 그대로 남아 있는 흰색 크레용을 어렵사리 빌려와서 산과 내 그리고 하늘에 떠있는 해까지도 모조리 흰색으로 칠한 다음 선생님에게 제출하게 된다. 아이들의 그림을 점검하던 선생님은 십중팔구 나를 앞으로 불러내어 귓밥을 잡아당기며 창문을 열어젖히고 삼엄한 얼굴로 앞산을 가리키며 무슨 색깔이냐고 묻게 된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내가 색맹은 아니었으므로 산이 파란 색이란 것을 모를리 없다. 그런데 파란색인줄 빤히 알면서도 왜 흰색을 칠해야 했는지 그 속 쓰린 사정을 선생님에게 설명하려들면 눈물부터 쏟아지던 슬픈 기억을 갖고 있다. 그 이후부터 나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미술 시간이 들어 있는 요일에는 의도적으로 배가 아프다 핑계대고 등교하지 않았다. 그 이외에도 나는 가난했으므로 경험해야 했었던 많은 아픔과 상처들을 갖고 있다. 그 슬픈 기억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깔려 있었다. 가난했으므로 감내해야 했었던 모든 고초와 시련은 어머니란 존재가 제공하고 있다는 편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사람이 갖는 성격적인 결함은 강한 자존심을 갖고 태어난다는 말처럼 나 또한 그랬기에 상당한 기간 동안 어머니에 대한 원망과 저주를 안고 살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나는 70세 이후에 쓴 <잘가요 엄마>라는 소설을 쓰면서 작가의 말에 이런 말을 썼다. <철부지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내 생애에서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 부끄러움을 두지 않았던 말은 오직 엄마 그 한 마디뿐이었다. 그 외에 내가 고향을 떠나 터득했다고 자부 하였던 사랑, 맹세, 배려, 겸손과 같은 눈부신 형용과 고결한 수사들은 속임수와 허물을 은폐하기위한 허세에 불과했다> 그제서야 나는 양순열 화백이 어째서 내게 이글 써주기를 요청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양숭열 화백의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어머니, 태어나서 백년을 부르고 오랜 시간 부르고 또 부를 어머니. 부르고 또 불러도 영원한 우리 어머니, 어머니> 짧은 글이지만, 곱씹어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 벅차오르는 이 글에 양순열 화백의 맑고 숭고한 영혼이 춤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리던 글을 쓰던 혹은 작곡을 하든 그 모든 예술 활동들은 방향이나 갈래는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어떤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같은 정점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는 것을 양순열 화백의 그림에서도 깨닫게 된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쫓아가는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영혼의 탐구일진데, 그림이면 어떻고 글이면 또 어떻겠는가. 뎃싱이 잘되고 못되고를 따지는 것은 항상 그러하듯 지금 막 출발하려는 사람들의 몫이다. 문장이 어떠하다는 것을 따지는 일도 출발선상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경지에 이르면 그런 잡다한 것들이 모두 허튼짓이란 것을 나는 양순열 화백의 그림에서 진하게 읽는다. 그의 그림에는 많은 어머니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또 그렸는데도 또 다시 어머니는 끓임없이 나타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부르고 또 불러도 영원한 우리 어머니>. 왜 그럴까. 어머니는 하느님이 당신 대신에 이승으로 보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그림은 일상생활에서 얻어낸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믿는다. 양숭열 화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형상화하려는 예술적 노력 속에는 남과 달리 어머니의 존재가 너무나 그득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이 양순열 화백의 영혼을 만들고 있으며, 그래서 그의 그림에는고결한 시가 존재하고 있다. 어머니가 있기 때문이다. 2014년 가을 김주영
- 고향을 그리는 순정스런 열정, 양순열의 첫 개인전을 축하하며 - 이태호 (전.전남대교수, 미술사 현.명지대교수)
안동 시내의 양순열이 조용히 작업하는 공간에 들어섰을 때, 그가 애써 그려온 산수풍경화 작품들이 유달리 눈에 들어왔다. 평이한 야산을 배경으로 펼쳐 놓은 옥수수밭과 숲, 들녘의 풍경들은 언뜻 그림으로 소화하기 힘든 소재인데도 불구하고, 엷은 청록색 담채로 그린 풀빛의 풍경화를 무던하다 싶을 정도로 고집스럽게 시도해온 것 같다. 양순열의 말대로 어려서 눈에 익었던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게다. “내게 자연은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산다는 것을 자연에 어울려 지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이 성공적인 것인지 아닌지 조차도 자연의 일부로서 욕심 없이 살아가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있다고 느낀다. 어쩌면 완벽한 착각일지도 모르는 나의 이 생각은 두렁을 따라 쑥뿌리를 캐고 꽃놀이를 하던 내 유년의 기억이 완전한 아름다움으로 추억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완전한 아름다움의 세계 그것은 이제 지난날의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가보고 싶은 이상향으로서 나를 유인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자연의 체취를 느끼며 그 숨결과 느낌을 나의 화폭에 소중히 기록하려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산수화 내지 그림들은 대부분 “길섶에 핀 제비꽃의 청초함이나 흐드러지게 피어 줄기가 휘어 보이는 개나리의 모습이나 따뜻한 햇살을 받아 싱싱하게 솟아나는 풀색이 짙은 잎 사이에 신비하게 피어나는 솔붓꽃에서 받는 느낌을 전달……” -(형상의 파장)전 팜플렛에서, 서울 후인갤러리, 1993- 해보려고 노력해온 결과물이다. 양순열은 고향이 안동에서 멀지 않은 의성 다인이라 한다. 중학교 때부터 대구로 유학하여 오랫동안 도회생활로 가꾸어졌음에도 순정스런 시골 냄새가 여전히 남아 있다. 버거운 소재이면서도 그렇게 풍경화들을 꾸준히 선보여 왔던 모양이다. 풍경화와 함께 그려온 호박이나 호박꽃, 옥수수, 들풀이나 꽃 그림에도 양순열의 순정스런 심성이 잘 드러나 있다. 풍경화보다 오히려 꽃 그림들의 경우에서 양순열의 기량이 돋보인다. 제비꽃, 진달래, 찔레꽃, 여뀌풀꽃, 분꽃, 솔붓꽃, 할미꽃이 핀 풀밭에 잠든 딸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은 차분한 담채로 조심스러우면서도 욕심 없이 그려낸 까닭이다. 풋풋하면서도 다감한 매력을 풍기며, 소담하고, 예쁜 그림들이다. 그런 반면에 선운사의 여정 중에 포착한 동백꽃이나 호박꽃 같은 그림은 가벼우면서 활달한 필선의 맛이 유연하고, 때론 봄 들녘의 들꽃과 그 화사한 분위기를 소담하게 추상화 시킨 작품들도 눈에 띈다. 이들과 더불어서 양순열의 그리운 고향은 호박과 호박꽃, 그리고 옥수수 밭을 담은 가실 그림에서 가장 잘 살아나 있다. 노란 호박꽃과 호박 잎의 대담한 설정과 수묵처리, 옥수수밭을 수묵선묘만으로 넘치게 구성한 화면운영, 옥수수밭 사이로 기어가는 방아깨비나 고랑에 함께 핀 풀꽃의 재치 있는 배치 등은 그의 다른 어떤 소재의 그림보다 자신의 솜씨를 마음껏 펼쳐 놓았다. 그리고 양순열 회화의 발전 가능성도 이런 호박이나 옥수수와 관련된 그림을 통해서 새삼 확인해 볼 수 있고, 이번 첫 개인전의 성과를 가늠케 하는 작품들을 내놓은 것이다. 양순열은 대구에서 미대를 졸업하고 결혼한 뒤 안동에 터를 잡고서야, 대학원을 진학하였고, 뒤늦게 다시 붓을 들었다. 그는 또 가정을 꾸려가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을 해가며 그림을 그려야 하는 또 다른 짐을 지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전반적으로 양순열의 그림들을 그도 수긍하듯이 전업작가로서의 세련된 면모보다 설익은 아마추어적인 것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그런 가운데 가슴 깊이 응어리진 그림에 대한 열정이 언제든 솟구칠 준비가 되어있는 듯하고, 또한 그것을 억제하면서 생활을 이끌어가는 지혜도 갖추고 있다. 이같이 자신의 예술세계를 가꾸어내는 양순열의 열정과 노력이 어설픈 가운데서도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의 촌아낙 같은 첫인상처럼. 기왕 시작한 만큼 지금까지 5~6년의 짧은 기간 쌓아온 그림들을 뒤돌아보면, 그리고 앞으로 계속 다져간다고 치면, 우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추억을 담는 일은 물론이려니와 지금 양순열의 현실 삶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작업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고향생각이 깊었던 만큼 옥수수 밭이나 호박 그림이 돋보이듯이 자신의 손길에 익은 혹은 자신이 가장 소중스럽게 여기는 것들도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산수풍경화의 경우는 커다란 방향전환을 요하는 영역이다. 그가 석사논문으로『겸재의 실경 산수화가 현대에 미친 영향』(1995.2)을 썼듯이 우리 미술사에서 풍경화의 고전인 겸재에서 청전과 소정에 이르는 산수화법을 공부하는데 새로이 시작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안동일대의 산세와 계곡풍경들은 고전적인 화풍에 근사하기에 더욱 그렇다. 이러한 점들을 보완하면서 자신의 화업을 쌓아간다면, 잔잔한 가운데 양순열 나름의 예술사를 창조해 낼 것으로 믿는다. 그의 조신하면서도 고집스러워 보이는 용모나, 순박하면서도 치열하게 살아라는 이름처럼. 이태호 (전.전남대교수,미술사 현.명지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