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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범모, 미술평론가,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양순열의 조형세계"

  • 작성자 사진: Soonyeal YANG
    Soonyeal YANG
  • 9월 24일
  • 3분 분량

원래 양순열은 이른바 동양화라고 불렸던 전통회화를 전공했다. 지필묵에 의한 사실적 표현법은 그의 예술가적 모태를 확인하게 한다. 그의 초기 작품을 보면, 간단한 선묘(線描)와 단순 구도 그리고 절제된 색채감각을 특징으로 읽히게 한다. 그러면서 화면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서정적이고 담박하다. 그래서 화가는 자신의 예술적 고향을 ‘동양회화’라고 강조하고 있는지 모른다. 비록 뒤에 서구적 어법으로 문맥을 바꾸었지만 그의 예술적 모태는 전통성에서 찾게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동양화 강의와 실기를 가르쳤다. 동양화는 참 맑고 따스하다. 내 어릴 적의 고향인 시골 다인처럼 포근하며, 개울물처럼 맑고 투명하다. 나의 존재는 물이었던가 보다. 가시로 막아도, 바위로 내리쳐도, 망치로 가루를 내어도, 나는 그저 흘렀던가 보다. 나의 모계는 분명히 동양화다. 아니 동양인 모두의 미술 뿌리는 동양화가 아닐 수 없다. 향수란 말은 때로는 정말 아름답다. 오십의 향수는 마루에 있음을.”

미술의 뿌리는 ‘동양화’라는 선언, 이는 작가의 예술적 위상을 점치게 하는 주요 열쇠 말이 된다. 더군다나 화가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물로서 비유하고 있다. 흘러가는 물, 이는 자연의 순리이고, 사회생활의 본령이기도 하다. 그래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생동감 있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물처럼, 진정, 물처럼, 살아 갈수만 있다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물은 자신의 존재를 최대한 낮추면서 낮은 곳으로만 흘러간다. 물은 내편 네편 나누지 않고 누구하고나 어우러진다. 민물과 짠물 구분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주장하지 않고, 물은 모두 강으로, 그리고 바다로 흘러간다. 이와 같은 자연친화주의는 동아시아의 존중받는 가치였다. 양순열의 그림 속에서 흘러가는 물의 이미지가 묻어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것 같다.

그동안 양순열은 미술계의 전면에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지 않았다. 흘러가는 물과 같은 이미지는 그의 작가활동 반경에서도 적용되었다. 그렇다고 그는 작가활동을 게으르게 한 것은 아니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또 무슨 무슨 단체 등 패거리 의식의 현장과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자아냈을 뿐이다. 그는 학고재 화랑 등에서 10회의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 정도 경력이면 결코 무명작가라고 볼 수 없다. 아니, 양순열은 저서 발행에 나름대로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미 [시간의 바다를 깨우다] 등 5종의 저서를 발행한 바 있다. 특이한 이력이다. 이는 출판미술의 장점을 익히 알고 있는 작업의 결과물이리라. 더불어 그의 문학 지향의 측면도 고려하게 하는 부분이다.

양순열의 근작은 [시간의 숲 공간의 숲이 있었다]으로 묶여졌다. 역시 글과 함께 그림이 있는 출판물이다. 제목은 시간의 숲과 공간의 숲을 강조했다. 이는 시공간을 동시에 일컫는다. 시공간이 병존하는 숲, 거기에 화가는 꿈을 담는다. 양순열의 회화작업에서 꿈은 키 워드가 된다. 그는 꿈을 꾼다. 그것은 바로 회화작업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사람에게 꿈이 없다면, 그는 이미 사람은 아닐 것이다. 꿈은 인간 존재의 최소 단위이다. 하지만 꿈은 개인마다 다르고, 또 꿈의 실현가능성은 천차만별이다. 양순열의 꿈은 사랑이 있는 꿈이다. 그래서 그의 예술적 주제는 한마디로 ‘꿈과 사랑’이다.

대작 <꿈과 사랑>은 마치 연극무대처럼 꾸며진 공간에서 이러저러한 담론이 오고가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몽환적인 분위기이면서 얇은 간색 위주로 색채의 온화함을 자아낸다. 그것도 동화 속의 여성주인공 같은 인물들이 여기저기 위치해 있고, 적당한 곳에 탁자와 같은 소도구도 동원되어 있다. 제목처럼 이 대작은 꿈과 사랑을 이국취미와 연결되어 도해한 듯하다.

소녀취향적 화면 구성이어서 일견 유약하게 보일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이국취미의 동화적 세계와 연결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는 물론 가치평가의 기준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요소이다. 평가야 어떻든 양순열의 조형세계는 꿈과 사랑의 무대이다. 그와 같은 개념과 함께 그는 ‘어머니’라는 개념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화가는 근래 자신의 소망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한 어머니 길에서 아늑하면서도 평화롭고 자유스럽게 물처럼 자연스럽게 낮은 곳으로 흘러 흘러 가고 싶은 바램이다.”

양순열에게 있어 어머니의 모습은 각별하다. 하기야 어머니에 대하여 각별한 마음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마는, 개개인의 입장에 따라 눈높이는 다를 수밖에 없다. 양순열의 어머니는 3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구상적 인체형상/ 숙임의 미학 (희생) 오뚝이 형식/ 두 다리로 걷는다, 두 팔이 있다 (직선 형식)

어머니의 모습, 최대한 단순화된 형상이다. 고개 숙인 모습, 그것은 희생을 의미한다. 헌신적인 존재,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 있고, 두 팔을 생략하거나 왜소하게 처리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최대한 낮추고자 했다. 여기서 어머니 모습은 하나의 기호이기도 하고 상징적 도해이기도 하다.

“화가는 어머니 오뚝이 인연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부모의 존재를 다시 그려보기도 한다. 가족보다 더 소중함은 없다. 너무도 평범하고 흔하면서도 아주 깊이 있는 인간조화를 만들어 감이 세상의 모든 어머니임을 자주 깨닫는다. 마치 쌀뜨물 발효액처럼.”

양순열의 조형세계는 꿈과 사랑과 어머니, 이와 같은 개념어로 이루어져 있다. 화풍상의 특징을 열거하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구도의 단순화, 그러니까 화면구성이 지극히 단순하다. 절제된 화면은 양순열 회화의 주요 특징이다. 더불어 배경 역시 단순미를 강조한다. 단일한 색상으로, 그것도 커다란 여백처럼 처리되기 마련이다. 색채는 2차색 위주, 그것도 밝고 경쾌하면서 온화한 색상을 선호한다. 인체도 기호화하는 상징성, 이 역시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을 수 있다. 그런 배경 위에서 펼쳐지는 작은 연극, 정말 환상극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이면서 상징적인 도상을 배치시킨다. 그것은 사실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나타난다.

혼란한 사회, 질곡과 모순의 시대, 이런 어둠 속에서 양순열의 작품은 하나의 청량제처럼 빛을 발휘하고 있다. 어둠의 현실에서 꿈과 사랑의 세계로 인도하는 전령사 같은 작품, 양순열이 지향하고 있는 세계, 바로 그와 같은 세계, 이제 우리들 앞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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