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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C. 모건, 전 로체스터 공과대학교 미술사 명예 교수, 미술 평론가, "양순열, 예술은 결코 같은 모습으로 머물지 않는 모험이다."

  • 작성자 사진: Soonyeal YANG
    Soonyeal YANG
  • 9월 24일
  • 9분 분량

양순열의 예술은 그녀 자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그녀의 예술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은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방향이기도 하다. 그녀는 트렌드를 따라하려고 열망하지 않으며, 또한 다른 예술가들이 매력적이라고 찾은 스타일을 모방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만의 길을 간다. 완숙한 예술가로서, 그녀는 그녀 자신만이 갖고 있는 판타지들과 그녀가 상상한 것들을 인간사의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시각으로 탈바꿈 시키는 그녀의 능력에 관심을 두고 있다. 또한 자신을 반영하는 작가로서, 양순열은 형태에 대한 그녀 고유의 생각을 색, 공간, 몸짓, 선 그리고 모양에 대한 자신의 뚜렷한 이해를 통해 지속시킨다. 이러한 요소들은 동시에 두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것들은 그녀의 친숙해 보이는 주제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그녀의 작품중에서 때때로 보여지는 서사시적인 장엄함에도 일조하기도 한다.  그녀의 시적인 판타지들은 현실의 끝자락에서 미묘하게 잡고 있다. 그녀의 절제된 양식의 어휘는 꿈에 대한 그녀의 확고하면서도 색다른 해석을 고정된 실체로 만든다. 이미지에 관한 그녀의 어휘들은 현실이 판타지로 바뀔  필요성을 나타낸다. 그녀의 감각들이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그녀가 느끼는 바를 그린다. 그녀의 그림들은 효과들의 완곡한 표현이 되어 나아간다. 느끼는 것과, 알고 있는 것과, 그리고 보는 것과의 사이에는 아주 작은 분리가 있다. 양순열에게 있어서 이러한 감각적인 특성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상호적인 과정을 형성한다. ‘영혼의 새’ (2009) 에서는 인물을 그린 실루엣의 무리가 사람들의 머리위에 앉은 커다란 흰 새들과 함께 붉은 배경에 도드라지게 널찍이 자리잡고 있다. 이 작품속에서 붓질은,  그녀가 판타지와 회화적 사실감을 연결한 근원으로 이해하고 상상하고 있는 인간사를 떠다니는 신비한 어떤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양순열의 작품을 대하면서 나는 자의식이 강한 표현 방법들 사이에 겹겹이 쌓여있는 격식을 차린 지적인 면을 발견하였다. 그녀가 ‘Dream & Love’ 시리즈에서 그린 인물들과 초상들은 표현하는 내용과 초현실주의적인 시각성 사이에서 매우 약하게 혼재된 일종의 ‘극도한 정지 (hyper-suspension)’ 의 어떤 모습을 보인다. 나는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를 프랑스의 시인 아포리네르로부터 빌리고 있으나, 단순히 그는 많은 예술가들이 빌려온 이 용어를 고안했을 뿐만 아니라, 이 개념이 어떻게 하여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보는 것들을 새롭게 만들어내는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자리잡게 했다. 설령 그렇다고는 해도, 몇 명의 예술가만이 그들 안에서 본 것들과 밖에서 발견한 것들을 함께 효과적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이 정신 분석으로 넘어가는 단계이다. 우리는 1924년 발표된 안드레 브르통의 유명한 ‘초현실주의  선언’을 통해서, 그가 아폴리네르로부터 초현실주의라는 개념을 전용한 것과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론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곧, 브르통은 미래의 예술은 우리가 외적 세계에서 인지하는 것들이 수신자의 내적인 필요에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고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개념의 방향으로 가야만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외적인 세계로부터 내적인 세계로 변환되는 과정에 있어서의 상상력은 이러한 변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양순열의 그림들은 일상 생활의 경험을 모은 것이고, 그것들이 예술로 변환 되었다. 만약 예술이 아직까지도 창의적이라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양순열은 이러한 관점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가상의 영향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그녀의 작품들은 인간의 정신을 좀 더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이해의 근원으로, 또한 보이고 존재하는 것들의 다른 길로 회귀시킬지도 모른다.  그녀의 그림들은 독특한 방식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있으며, 인간의 정신과 육체  사이에 지속되는 자연속에 있는 메세지들을 풀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녀는 강요나 가식적인 요소 없이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인다. 양순열은 그녀의 작품들속에 편안함을 유지시키고 있다. 특히 몇몇의 작품에서는 – 예를들면 ‘Dream & Love’의 경우에는 서사적인 이야기의 범주에 속하게 되나 -, 판타지와 현실을 결합한 초상들이라든가, 작품에 사용된 원형의 틀들, 역설적으로 우아하면서도 팔 없는 여성들의 모습을 등장시키는등  대국적인 시야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예술가로서 또한 이러한 서사적 이야기들의 서술자로서 계속해서 인내하며, 마치 각 작품들이 그녀가 작업실에서 보낸 긴 세월동안 진화한 것 같다.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견뎌내었기 때문에, 양순열은 그녀가 가야만 할 새로운 방향을 인식함으로써 예술을 통해 그녀 자신의 다른 모습을 보여줘왔다. 꽃피는 안동 지방을 떠난 후, 그녀는 갑자기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그녀 자신을 찾는다. 그녀가 일상에서 겪는 일들은 그녀를 둘러싼 자연스러운 주제로 바뀐다. 지금은 꽃잎들이 떨어져나간 색과 형태의 추상적인 과정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더이상 그녀는 전통적인 안료와 종이를 사용하는 한국화적인 방식으로 꽃들을 그릴 수가 없다.

혹자는 어떻게 현재와 관련지어 과거를 다루는가? 어떻게 보면 시골에서의 삶은 이 작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가 없었다. 불교적이거나 샤머니즘에 가까운 사상들은 유교적인 실존적인 영역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작품들로 꼽을 수 있고, 또한 다채롭게 시적인 성격을 갖는 ‘호모 사피엔스’ 시리즈 (2006) 의 거대한 세 그림 ‘깨달음’ ‘경배’, 그리고 ‘욕망’은 눈에 띄게 예의바르고 우아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갈등의 인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작품들에서 양순열은 그녀만의 언어와, 개인적인 신호와 상징의 코드를 발전시킨다. 그녀의 깊은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색, 선 그리고 형태가 만드는 밝은 세계로 발전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의 근원지로부터 발하는 메타언어의 하나인 것이다. 각 화면에서 보여지는 상당히 침묵적인 모노크롬으로의 접근은 70년대의 한국작가들에게는 친숙한 아방가르드 미술을 연상시킨다.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함께 순화된 모노크롬을 단순하게 남기는 것 대신, 수직의 암벽들, 무속신앙의 굿판의 장면에서 친숙할 법한 신성한 애니미즘적인 돌들이 있는 풍경에 다른 인물들이나, 애원하는 혹은 기도하는 형상을 한 그녀의 전형적인 여인상들을 더한다. 이 작품들에는 선명한 노스탤지어와 갈망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주명해 보려는 욕망도 표출되어 있어서, 표면에 그것들의 고유한 빛을 주고 있다. ‘욕망들’ (2006) 이라는 작업에서는, 서로 같은 거리에 있으면서도 각기 다른 모습을 한 다섯개의 부유 물체가 제 각각의 ‘기’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은 인삼뿌리 혹은 고대의 돌들, 아니면 화석화된 배설물과 같은 모습을 한 물체의 다발들 일 수 있다. 시각적으로 무엇을 언급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 형태는 가장 원초적이며 가공되지 않은 상태의 자연의 존재를 보여준다. 이 세 작품에서 양순열은 욕망의 의미를 노스탤지어로 가득한 갈망으로 포착한다. 반대로 모든 노스탤지어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구현은 그녀의 예술에 변화를 요했던 재빠르고 지속적인 도시 생활의 영위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그녀의 시각적 감각을 함께 웅켜쥐면서 얻어진 또 다른 차원의 이해를 향해 그녀의 작업이 이행하면서 시작되었다. 바꿔말하면, 그녀 자신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예술도 변해야만 했다. 그 합일점은 예술과 삶의 사이에서 동시발생한 것이었고, 또한 거기로 부터 자신을 위한 의미의 새로운 감각들을 얻기 위함이기도 했다.

많은 작품들이 이 방향을 향해 놓여있음을 가리킨다. 마치 시간 그 자체가 그녀의 기억과 판타지들이 결합된 산물인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진행된 그녀의 여행이 바로 작품화된 경우도 있다. 보이는 사물의 외적 모습을 그려내는 것보다 그녀가 냉엄함을 직시하면서 보이는 것을 옮기는 것에 더 관여하고 있으며, 때로는 심지어 그녀의 현실에 내재된 시각성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오리온 별자리가 보이는 밤하늘을 등지고 내리막 계단에서 구부리고 있는 한 여인을 그린  ‘길을 잃다’ 와 같은 작품들. 그녀의 생각들의 자취를 따라갈수록 생각과 느낌들이 끊임없이 그녀와 대면하기 때문에, 그런 그림은 시간의 생생한 공간을 보여준다. 그러나 때때로 그녀의 갈등은 바깥 세상으로부터 좀 더 개인적이고 내적인 세상으로 의미를 옮기기 위한 원동력을 그녀 작품에 부여하고 있다.  마치 체념어린 듯한 인상을 불어넣은 것 같은 그녀의 팔 없는 상징적인 인물들의 뒤에 있는 정화된 경험을 우리들에게 인식하게 한다. 또한 우리의 통제를 넘어선 자연의 방대한 흐름속에서 끄집어 낸 존재의 무참한 고통의 느낌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작가의 통찰력이 갖고 있는 강도나 흐름이야말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작가의 여행과 그녀의 상징적 인물들과 관련한 에피소드들을 감지한다. 때로는 영혼의 창을 보여주는 듯한 양순열의 작품을 통해서, 눈을 활짝 뜨고 감각들을 일깨우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들을 천천히 바라보도록 초대된다. 그렇게함으로써, 우리는 우여곡절은 물론 아마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 방법으로 인간들이 몰려있는 미지의 미래에 있을만한 가능성 마저도 본다. 양순열은 그녀의 미술을 통해서 그런 세계를 마음속에 그리려고 모색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 들어 양순열은 회화와 조각의 두 분야에 몸담고 있다. 이전에 했던   전통적인 수묵 기법으로 꽃을 그리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그녀는 폭넓은 기법과 재료를 수용해 왔다. 입방형의 주추를 세우고 철사를 사용한 ‘아버지의 의자’ (2011)와 같은 목재 의자로 부터 시작하여, 청동 주물로 떠진 땅콩들로 만들어진 수직의 몸체에 지구본을 얹은 조각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녀의 가장 설득력 있는 유화작품 중의 하나인 ‘철학자의 식탁’ (2008)에서 한 남성이 다양한 작은 모티브들이 그려진 삼색의 줄기를 뿜어내는 식기와 접시가 놓인 탁자 앞에 앉아있다. 철학적인 사고나 반추에 필수적인 본성으로 부터 나온 요소들과 결합되어 이 형태가 생겨났다. 이 경우 조각과 회화 모두 철학자스러운 어떤 면모를 보이며 깊은 명상을 위한 대상으로 보여지는데, 이것은 양순열의 다른 작품에도 편재되어 있는 테마이기도 하고, 마치 본성의 근원으로 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처럼 작가는 장식성이 강한 액자에서 보여지는 물체감이나 주조된 조각을 회화와 결합시키는 방법을 취하고 있어서 개념주의적인 요소가 있는 것처럼 여겨질지도 모른다.

Dream & Love’에서 보여지는 판타지나, ‘클라라 슈만’ (2010)의 초상화에서도 이러한 구성이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녀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느낌들을 표현하고 싶은 갈망을 위해 일반적인 재료나 하나의 도구로 국한 시키지 않은 것을 보여준다. 고로 양순열은 변환시키는 트랜스포머이자 한가지 방법에 머무르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본 것들은 결코 동일한 것으로 머물지 않고, 다른 것들의 예기치 않은 화상으로, 우리가 보려고 의도하지 않았던 무엇 혹은 누구인가로 변환되는 것이며, 일상 생활에 있는 놀라운 일은 캔버스들 혹은 스텐레스 스틸로 만들어진 조각의 시공에서 분리되어진다. 여기서 나는 ‘ 존재의 문’ (2001)의 입구에 흩어져있는 추상적 군상을 떠올리게 된다. 이 경우에 보는 것과 아는 것은 아마도 그녀의 작품이 갖는 지각적이면서도 개념적인 면을 표현하고 있을지 모른다. 느낌을 매개로 하여 그녀가 본 것을 옮겨놓고, 또한 그녀가 알고 있는 것들을 한 걸음 더 나아가 변환시킨다. 미학적으로 말하자면, 느낌이 그녀의 작업에 다다르는 과정에 관해 의문이 생길지도 모른다. 완전히 변증법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양순열은 어떠한 경우에도 어떻게 하면 이런 생각들을 어느정도 예술에 반영시킬 수 있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테이블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남자는 우리가 주지하고 있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헤겔에 가까워진다.

 커다란 화폭에 그려진 ‘시간의 바다를 깨우다’ (2012)는 군도가 있는 열린  바다 풍경을 보여준다. 아래의 청색 톤의 바다 풍경은 하나의 섬으로 부터 구름 위까지 맡닿는 빨강, 파랑, 녹색 그리고 노랑의 수직 선들과 함께 밝고 열린 공간으로 표현되어 있고, 그림의 상단은 흙색 톤에 크게 그려진 꿈의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다. 바다와 하늘은 깨어있는 생각이 현재형의 시간으로 들어간 것처럼 가깝게 있음을 보여주지만, 이 작품은 아마도 심리학자 융이 말한 연속적인 꿈으로 변환되는 사건들과 같은 그녀의 무의식속에 축적되어있던 경험들의 역사, 혹은 무의식의 장면으로서 이해할 수도 있다. 또 하나의 작품, ‘Dream & Love’(2008-2010)은 더 복잡한 도상을 사용하고 벽화처럼 보이는 방대한 풍경을 그렸다. 가로폭이 긴 이 거대한 작품은 두 측면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그 하단부에는 이브닝 가운을 걸친 24명의 팔 없는 여인들이 움직임이 표현되었고, 상단에 위치한 공간의 추상적인 벽들은 빨강, 파랑 그리고 희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 벽들을 가로지르듯 미로와 아르프의 추상적 표현과 비스한 형체들이 떠다니고 있다. 팔 없는 여인들이 등장하는 오페라의 시나리오를 보고 있는 듯한 연극적인 요소를 느끼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만큼 움직임을 느낄수 없다. 그들은 무대 곳곳에 그럴듯하게 고정된 위치에 놓여져 있다. 그런데도 이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점은 그들이 마치 꿈 속에서처럼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 같이 격식을 차리 가운을 입고 있는 그들은 앉아 있거나, 허리를 굽히거나, 혹은 서 있다. 또한 그들의 얼굴은 부담 없는 즐거움이 깃들어있다. 그러나 그들의 느낀대로 움직일 수 없게 하는 알 수 없는 힘이 감춰져 있다는 암시가 보인다. 그들은 은밀히 서로 묶여 있으나, 동시에 그 어떤 접촉도 금지되어 있다. 벽화처럼 보이는 ‘Dream & Love’의 화면은 서사극을 보여주는 연극 무대의 규모를 연상케하나, 다만 여인들을 표현하는 형식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최근의 양순열의 작품에서 계속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처럼 보여진다.

 

앞서서 나는 친밀하거나 혹은 서사시적인 규모, 그 어느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는 양순열 작품이 갖는 양분적인 면에 언급하였다. 화면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혹은 캔버스라는 평면이나 입체적인 공간에 작업을 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느 경우에서건 비슷한 형식을 갖고 접근을 하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그녀의 시각적인 시(visual poetry) 로 승화시킨다. 벽화의 한 부분은 특히 다섯 여인들이 둥근 모서리의 탁자 주변에 앉아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 탁자 위에는 작가가 이전에 회화나 조각에서 사용해 왔던 이미지의 형상을 한 오브제가 놓여있다. 그러나, 여인들은 손이나 팔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단순히 그 물체들을 관찰한다. 그들은 응시하며 바라볼 뿐, 그 오브제들과 촉각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아마도 이러한 의미에서 에로틱함을 절제하는 명백한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체는 육체적인 감각을 충족시키는 주물처럼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만져지지 못한다. 이 작품 속에서 모든것은 그 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그 어떤 것도 작품 틀의 밖에서 안으로, 혹은 안에서 밖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이 여인들의 운명이 벌써 결정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같이, 무대는 이미 셋팅이 끝나있다. 이러한 운명을 다룬 개념은 불교적 영향이리기 보다는, 1910년에 막을 내린 조선 왕조가 건국된 이래로 한국적인 사고방식에 깃들어 온 정서인 유교적인 것에서 유래한다고 할 수 있다.

 

장대한 서사시적인 느낌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그들을 스쳐지나간 ‘Dream & Love’라는 그림 밖의 세상인 과거로부터 강요된 여인들의 안주와 통제의 시그니피앙으로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에는 전통과 역사의 짐이 깊이 박혀있다고 덧붙일지도 모른다. 이 작품에서 높이 살 점은 이러한 이슈에 대해 특정한 판단을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그녀의 화법 능력속에 존재하는 탄력적이고 확실한 전략 뿐만 아니라, 젠더, 사회, 종교 그리고 정치에 이르는 많은 분야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흥미롭고 심오하다. 서사시적인 웅장함이 필요없는 친근한 소재들을 그린 작품들 -‘만남’ (2010) 이나 ‘그대와 함께하는 커피는 항상 향기롭다’ (2009)- 역시 그러하다. 전자는 고독을 회상하고 있고, 후자는 누군가와 함께 하는 동반을 받아들이고 있다.  두 작품은 매우 강한 감상적인 면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만남’은  그녀의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인물들이 서 있는 자연의 공간의 외관적인 모습인 반면에, 정확히 한복처럼 보이지는 않으나 느슨한 가운을 걸친 여성의 실루엣은 하나의 정형화된 형태이다.(필자의 문장이 제대로 끝나지 않았음!)  그녀는 밑을 내려다 보며 마치 애원하거나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긴 목을 앞으로 내밀고 있다. 이 인물은 적어도 그녀가 2006년터 계속해서 그리고 있다. ‘그대와 함께하는 커피는 항상 향기롭다’의 경우, 색이나 구도, 그리고 분위기가 ‘철학자의 식탁’에 가깝다. 두 그림의 차이는 작가가 생각하는 과정이 어떻게 다를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최근 2012년부터 그리기 시작한 ‘어머니’ 시리즈에서 어둠을 화면에서 걷어내고 그 공간을 빛으로 채워 넣는다. ‘Dream & Love’와 같이 커다란 사이즈의 작품이어서 조형화보다는 텃치감에 더 치중을 하고 있다.

 

그녀의 주제가 갖는 헌정의 의미는 이 연작들의 기본이 되어있지만, 양순열의 그림들이 주는 형식적인 효과는 참으로 놀라우며, 이미 이전에 작업해 온 작품들을 뛰어넘어 그 중에서도 가장 명료하고 활력이 넘치는 감각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작품들의 표면에는 빛이 담겨있고, 그녀가 인물을 그리는 방식은 나무랄 데 없이 시각적인 명료함이 깃들어있다. 이 작품들의 추상적이고 상징적이면서도 묘사적인 형태는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을 받아들이기에 효과적으로 함께 작용하고 있으며, 이렇게 받아들일 때에 지각하는 이의 마음에서 의도적인 상황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은 진정한 성과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단지 모성애를 다룬 주제에 근접할 뿐 아니라, 가식이나 꾸밈이 없이 표현한다. 그야말로 특별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양순열의 작품에 관해 아직까지 남아있는 의문점은 이것이 사회적이며 경제적이면서도 매우 미학적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길을 바꾸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녀의 방향을 바꿀 권리가 있는가?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그녀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져야만 한다. 예술의 자유를 자신이 기울여야 할 노력의 본보기로 삼는 것은 예술의 낭만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외적인 수요는 작품의 거래를 늘리고 거기에 순응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사회적 태도나 경제적인 이익에 관해서만 강조할 뿐, 미학적인 측면에 관해서는 등한시 하게된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있어 예술 단지 그러한 현상으로 축소될 수 있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일이다. 다양한 의견들의 맥락을 따져보면, 예술에 대한 투자가 이루어지는 현대 미술의 시장은 매우 근래에 형성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몇 세기에 걸쳐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후원자나, 수집가들, 그리고 기관에 팔아왔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도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투자를 하여 좀 더 큰 이익을 축적하려면 예술에 투자를 하는것이 좋은지에 대한 여부를 놓고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떤 작가들은 상상했던 것을 훨씬 넘어 그들의 작품에 엄청난 이익이 증대되어지는 것을 보며 즐긴다. 반면, 다른 예술가들은 단순히 그들의 작업을 하는 것에 만족을 하고, 자신과 가족을 부양하기에 충분한 돈을 번다. 그들 역시 상당히 행복해하고 있으며, 가끔은 혼돈상태로 빠지기도 하며 도전과 경쟁이 팽팽한 미술 시장에서 그들 나름의 방식을 고수하며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비록 상업적이고 홍보적인 일들을 갤러리나 에이젠트에 맡김으로써 이러한 문제에서 손을 뗀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이로 인해 침해받는 일은 실제로 존재한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압박에 둘러쌓인 가운데, 진정한 예술가는 그들의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작품으로 남을 수 있는 방향으로 변하기 위해 싸워야만 한다. 상업적인 방법이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지향하는 길인 것이다. 만약 예술가가 자유롭게 변화할 수 없다면,  예술작품은 지나치게 포화된 상업 미술 시장의 모든 조건에 좌우되는 한낱 상품이 되어버린다. 예술은 특별해야만 한다. 그 자리에 머물며 순응하는 것을 거부하고, 기쁨과 참된 지식의 근원이 되어야만 한다. 양순열의 예술은 바로 그러하다.

 

 

로버트 모건은 로체스터 공과 대학의 미술사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화가 이며 큐레이터는 물론 비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경력을 가진 그는 미술사에 관한 강의를 하며 많은 책과 모노그래프, 그리고 미래의 예술에 있어서의 글로벌화가 가져다 주는 영향과 작가들에 대한 에세이를 집필해왔다. 그의 많은 저서들은 세계 18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신간은 2012년 12월에 중국어로 출판될 예정이다. 1999년 살라망카의 지방자치제로부터 미술 미평부분에서 처음으로 Arcale상을 수상한 모건은 2011년 과학과 예술분야의 유럽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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