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 ‘애통하다’는 형용사를 어떤 때 써야 하는지 그 뉘앙스를 정확히 알게 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였다. 그분이 떠나신지 벌써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눈시울을 붉히지 않고 ‘어머니’라는 단어를 꺼집어 올리기란 쉽지가 않다.
일흔 다섯에 몹쓸 병에 걸리신 것을 안 후에도 김영순, 내 어머니에게는 도저히 사실을 알리지를 못했다. 갑자기 다가온 ‘죽음’이라는 두 글자의 무게는 나 스스로 지탱하기도 어려웠고, 어머니가 받아들일 ‘공포’의 크기를 가늠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수술도 한 번도 거치지 않고… 그런데 그 분이 하늘로 떠난 뒤 더 이상 죽음이 ‘막막’ 하지만은 않게 됐다. 하늘은 그 분이 계신 곳이고, 그래서 언제 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고나 할까.
세상에서 가장 바쁜 직업 중에 하나로 꼽히는 기자생활을 하면서 두 딸과 한 아들을 키우는 동안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든든히 이 땅에 뿌리내려 무성한 열매 맺는 나무가 되도록 때로는 비가 되고, 또 때로는 거름이 되셨다. 그분에게 나는 간혹 은근한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겠지만, 아주 자주는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을 가능성이 크다. 마흔 후반에 ‘청상’이 되어 억척같이 3남2녀를 키워내었는데 편히 쉬어야 할 노년에 내가 안겨드린 ‘부담’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그러나 단 한 번도 힘들다고 내 아이들을 밀어내신 적이 없다. 바쁜 일상 중에서도 추수기에 당신의 다섯 자식에게 뭐라도 나눠주고 싶어 텃밭 가꾸기에 열중하셨다. 아침햇살 아래서 난을 돌보고, 국화와 선인장을 곱게 키우던 모습은 아직도 아련하다.
작가 양순열의 작품에는 내 어머니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아니 어쩌면 지구상 대부분의 어머니 삶의 모양과 빛깔은 그와 닮은 꼴 일 것이다.
양순열 화가에게도 어머니는 모든 것을 받아내는 그릇이다.
그녀는 “존재의 탄생이 모두 어머니로부터 왔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모든 것이 내 안에 있다”라고 한다. 삶의 원초적인 본질을 어머니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은 삶의 가장 귀한 가치이다.
화가이며 큐레이터인 로버트 모건(미국 로체스터 공과 대학 미술사 석좌교수)는 양 화가의 ‘어머니’ 작품을 “어둠을 화면에서 걷어내고 그 공간을 빛으로 채워 넣었다”며 “모성애를 다루면서도 가식이나 꾸밈없이 표현한 특별한 작품이 되었다”고 묘사했다.
‘어머니’는 또 늘 밝은 세상을 향해 있다.
양 화가 어머니의 우스꽝스런 ‘줄넘기’는 피시식 웃음을 자아내고, 자상하고 은은한 미소는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속을 태울지언정, 그것은 결코 인간을 상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간 본연의 가장 선한 감정으로, 순수함과 보다 본질적인 것에 대해 헌사이다.
양 화가는 말한다. “어떤 예술이 이 세상에서 필요한가 생각해 봤을 때 쇼킹한 것보다 심성, 영혼에 도움을 주는 작품을 하고 싶다. 내 작품을 보며 도움을 얻는, 종교처럼, 에너지를 받을 수 있는 작품을 펼쳐보이고 싶다”고.
그것이 바로 어머니의 맘이 아닌가.
지난 30여년의 세월 동안 열병 앓듯 작업을 해 온 양 화가는 조만간 아들 딸을 출가시켜야 되는 50대 중반의 여인이 되어서 본격적으로 작품 세계로 빠져드는 것 같다. 그리고 돈이 되지 않아도, 그의 작품을 보며 잠시나마 누군가가 지친 정신을 쉬어 갈 수 있다면 하는 작은 바람을 품을 뿐이다.
순수한 회화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은 가운데 삶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그림으로 풀어내면서 먼저 자신의 맘을 닦고, 세상을 정화하려는 욕망이다. 이 역시 어머니의 맘이다.
쟨 힌맨과 찰스 힌맨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하기 위해 그녀는 캔버스는 물론이고 각종 미디어를 폭넓게 활용해 인간에 대한 관심, 인간관계를 진지하게 성찰하며 인간의 꿈, 사랑, 행복, 존재, 욕망 등을 표현하고 특히 인물과 그를 둘러싼 공간을 초현실적으로 담아냈다”라고 평가했다. .
그 때문 일까. 그녀의 어머니 작품을 보면서 종종 평안을 얻는다. 밝은 파스텔 색조 앞에서는 희망을 본다. 그리고 내 어머니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이영란 (영남일보서울지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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