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양순열은 대학에서 전공한 분야가 ‘동양화’였던 만큼 전통적 방식에 따라 한지에 지필묵으로 사군자와 실경산수, 꽃들을 많이 그렸는데 그 중에서도 들에 핀 갖가지 야생화를 자연 그대로 잘 그렸다. 특히 화선지에 수묵담채로 그린 야생화는 섬세하고 때로는 분방한 운필로 하여 들판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야생화의 원형에 다가서고 게다가 화가 자신의 소박하고 따뜻한 심성이 투영된 듯하여 보는 이의 정감을 더해주고는 했다. 그런 그림들로 그는 몇 차례 개인전을 가짐으로써 수묵담채로 그린 꽃그림으로 일가를 이룬 화가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그의 그림이 아주 다른 그림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는바, 그림의 재료와 형식, 주제 모두가 그전과는 판이하여 도무지 같은 화가가 그린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그림이었다. 한 화가의 그림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가, 있다면 왜 그런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그 이유를 그는 자신의 달라진 환경에 있다고 말한다.
“풀과 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고 소박한 꽃들과 풀들이 어우러졌던 구릉의 미감에 흠뻑 취해 살아왔던....안동”을 떠나 서울에 정착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들과 각기 다른 그들의 생각과,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역동적인 혹은 조용한 관계와 직면하곤 한다. 자연을 보며, 자연과 함께 살아온 나는 자연스럽게 우리 사람들의 문제로 가슴을 가득 채워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하기 위해 화가로서 부닥친 문제는 한지와 수묵담채 이외의 더 적절한 매체와 표현방법을 모색하다가 캔버스에 유채로 그리기 시작하였는바, 유화는 곧 그가 사람사는 세상으로 눈길을 돌림에 대응하여 선택한 작업방식이었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인간에 대한 관심, 인간 간의 관계, 인간이 바라는 것에 대해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랑, 꿈, 행복, 희망, 존재, 욕망 등을 주제로 작업을 했는바, 이 그림들은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대개 관념적이나 추상적인 것이었고 그러한 것을 그리려다 보니 인물을 추상적으로,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도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고는 했다. 「깨달음」「경배」같은 그림이 그에 속한다. 이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2005년 무렵부터이며 ‘Homo Sapiens’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그림을 그렸고 2007년에는 같은 제목으로 화집을 내기도 했다.
이 그림들은 그가 그 전에 그려왔던 동양화와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화가가 그때까지 해오던 그림 말고 다른 그림으로 바꾸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더구나 중년기에 들어서는 더욱 쉽지 않은 일임에도 양순열은 그런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근래 들어 그의 작업은 또 다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조그마한 인체들을 소조로 빚거나, 혹은 나무를 깎아 만든 ‘군상’과 같은 설치작품을 하는가 하면 objet trouve(발견된 사물)로 작업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림 그리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작업이다. ‘objet trouve' 는 일찍이 초현실주의 이래 현대미술에서 주로 활용되는 방식인데 이렇게 판이한 방법까지도 그가 활용한다는 것이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오브제작품 「아버지」에서 안전모는 ‘오늘의 한국을 일으킨 모든 아버지의 축약된 이미지’로, 「아버지의 의자」는 한시도 앉을 새 없이 일만하며 살다 간 이 땅의 아버지의 리얼리티를 즉물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이러한 오브제 작품은 초현실주의나 팝 아트에서의 그것과는 다른 방법이며 그의 관심이 이러한 매체로까지 나가고 있다는 것은 곧 인간에 대한 그의 관심이 확대되어감과 동시에 인간을 보는 눈이 한층 더 예리해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 화가가 스스로 익히고 달성한 자기 고유의 표현양식, 각고의 노력 끝에 획득한 자신의 개인 양식을 떠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한다는 것은 매우 힘들 뿐 아니라 일종의 모험에 가깝다. 하지만 그러한 모험은 화가 스스로가, ‘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절실함이’ 다시 말해 ‘내적 필연성’에 의한 것일 때 그것의 성공 여부를 떠나 평가받을 만한 일이고 창조적인 화가의 길이다. 양순열은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화가 양순열은 “나의 바램은 내 작품에서 잠시나마 사람들의 영혼이 쉬어 가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아마도 그 바램을 위해, 더 나아가 할 수 있는 온갖 매체와 방법을 통해 그 바램을 드러내려 할 것이고 궁극적으로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것이 어떤 작품일지 모른다. 이번 작품집은 아마도 화가 양순열이 자신의 바램을 향해 가고 있는 도정의 일단을 보여주는 소중한 공간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 윤 수 (미술평론가/ 전 국립현대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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